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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살아가기

편지 2014. 12. 9. 01:06

해방이가 세상에 빛을 본지 2번째 날. 종일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여보를 보며 오만가지 생각이 맴돌았던 날.

 

당신에게2

오전 6시가 되어서야 당신은 물을 마실 수가 있었어요. 저녁 8시가 되서야 미음 한 그릇 비울 수 있게 되었구요.

아, 정말이지 '엄마는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가는 '아, 이 세상에 여자로 살아가기가 참 힘들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있잖아요, 여보. 아직 내 머릿속은 잘 정리가 안 되요. 대학시절, 그리고 일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페미니스트'임을 생각하고 살았다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나봐요. 당신이 진통을 하고, 수술을 마치고서 물 한 모금 먹지 못하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었거든요. 당신의 아픔, 고통을 이해할 수도 없었죠. 그런데 그렇게 아픈 사람은 당신뿐만이 아니더라구요.

 

우리 병실에는 다른 산모들도 있잖아요. 바로 옆 침대 산모의 가족들이 다녀갔어요. 그 산모 남편도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고 있었죠. 산모 친정 어머니가 어제와 같이 아침 일찍부터 병실을 찾았어요. 수발과 산모의 투정까지 다 받아주었죠. 그렇게 저녁 시간이 되자 그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갔어요. 곧이어 시댁 식구들이 찾아왔어요. 산모의 시아버지와 새언니가 함께 왔어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 새언니도 출산의 경험이 있었던지, 아버지와 출산 때 이야기를 했어요. 수술을 마치고 아버지가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봐서 빨리 가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새언니는 '마취도 덜 깨고 아파 죽겠는데 자꾸 애기는 어떻냐 이런 거 물어보니 짜증이 났었다'고 말했고, 시아버지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겠어. 이제는 알아서 어제 안 오고 오늘 온 거'라며 호탕하게 웃어 넘겼어요. 아, 세상 남자 대부분은 저렇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아이를 보러갔다가, 곧 돌아갔어요. 남편과 시댁식구들은 저녁 먹으러 밖에 나갔고, 산모는 혼자가 됐죠. 그 무렵 우리 식구들이 왔고, 옆 침상의 산모는 말이 없어졌어요. 밥이 왔는데 먹지도 않았죠. 시간이 좀 흐르자 산모는 어디론가 전화를 했어요.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10분쯤 후에 남편이 들어와 함께 화장실로 갔고, 5분쯤 지나자 헐레벌떡 한 분이 병실문을 급하게 열고 들어왔어요. 옆 산모의 어머니였어요. 머리감다가 전화받고 급하게 왔다고.

 

참 불공평하죠. 여자는 출산 준비부터, 출산과정까지, 그리고 아기를 어떻게 키울지 까지 다 책임져야 하는데. 남자는 '몰랐다'는 말 한마디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게. 어제 당신 자궁이 40% 열린 상태에서 멈춰 10시간 정도가 흘렀을때, 그제서야 나는 이런저런 검색을 시작했어요. '자연분만 제왕절개', '자연분만 중 제왕절개', '제왕절개의 장단점' 등을 검색창에 입력했죠. 사실, 나도 알고 있는 게 너무 없더라구요. 다 알아보는 것처럼 큰소리 뻥뻥 쳐놓고. 당연히 자연분만이 될 거라고만 생각했었죠. 검색을 하니, 대부분 '자연분만을 하면 아이에게 좋은 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더라구요. 산모를 기준으로 이야기는 잘 하지 않더라구요. 아무렴, 멀쩡한 배에 상처를 내는 것 자체가 좋을리 만무하겠지만요. 기준은 산모가 아니었고, 오직 아이에게 초점이맞춰져 있었다는거죠. 마치, 자연분만의 공포가 두려워 제왕절개를 선택하는 산모를 질타하는 듯한 느낌도 받았어요. 아이도 중요하지만, 산모의 몸에 대한 선택권은 당연히 산모에게 있는건데 말이죠. 나 역시 이 부분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도.

 

여보, 아무래도 내가 온전히 당신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거에요. 지금 이야기를 당신을 이해 못 하는 내 모습의 알리바이로 삼으려는 건 결코 아니에요. 아무래도 나의 머리와 행동이 따로따로일때, 우리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에요. 난 여자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에요. 우리 해방이도 딸이잖아요? 두런두런 넋두리가 길었어요.

 

내일이면 당신도 해방이를 볼 수 있겠죠?

 

 

해방이에게2

오늘은 새벽부터 눈이 왔단다.

'이 눈은 우리 해방이 생일을 축복해주기 위한 하늘의 선물이야'는 상투적인 말 따위를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벌써 해버렸어. 엄마가 마실 보리차를 사기 위해 편의점으로 가는 길, 내리는 눈을 보고 아스팔트 위에 '사랑해'라는 문구를 남겼단다. 엄마와 해방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거든. 눈이 내렸으니까!

 

아빠는 30년을 아들로 살아왔어. 예전 90년대까지만 해도 MBC드라마 <아들과 딸>같은 풍경이 많았지. 요즘은 달라졌다고들 해. 워낙 출생률이 낮으니까 말야. 아빠는 그 시대변화를 지나쳐왔단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었지만, 남자로 태어나서 이득 본 일과 손해 본 일을 계산해보면 아무래도 이득 본 일이 더 많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거야. '역차별'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지만, 일상을 찬찬히 돌이켜보면 주변 환경이 아직까지 남자로 살아가기 더 유리하게 만들어져있거든. 물론, 오늘 아침에 널 보러 가서 '앉아보고 싶다'고 간호사 언니에게 말했는데, 거절당했어. '남편 분은 안 됩니다. 산모만 됩니다'라는 답변과 함께 말야. 그때는 쬐끔 불편부당하다고 생각했어. 어제까지는 엄마가 처음 안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흔쾌히 '아빠라도 먼저 안아야 한다'고 말했었거든. 그래서 부픈 마음을 안고 갔는데, 너무 쉽게 거절당했어. 수유실로 종종 걸어들어가는 산모들을 보면서 더욱 좌절했어...ㅠㅠ

 

무튼, 아빠는 남자로 태어난 자부심이 엄청났나봐. 몇가지 장면들이 늘 생각이 나. 초등학교 5학년 때였지. 남여 짝궁이었어. 아빠 짝궁인 친구는 참 착했어. 연필도 잘 챙겨가지 않던 아빠에게 펜, 지우개 등을 빌려줬고, 샤프심도 늘 준비해줬어. 그런데도 왜 그런 심통이 낫는지, 아빠는 책상에 선을 그었어. 여기 넘어 오지 마라고. 근데 그 친구가 선을 넘어온거야. 공책에 글을 쓰다가 살짝 넘어왔는데, 아빠는 노발대발 하면서 화를 냈어.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었지. "어디서 여자가 남자가 그어 놓은 선을 넘어오느냐"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 또, 한 장면이 더 있어. 중학교 2학년때, 아빠는 남중의 실장이었단다. 아빠는 국어 선생님을 참 좋아했었어. 남중에서는 만날 수 있는 여자가 선생님밖에 없었거든. 더군다나 그 선생님은 외모마저도 아빠 스타일이었어. 물론 선생님은 결혼을 했고, 둘째 아이까지 임신 중이었어. 아빠는 일부러 그 선생님 눈에 들려고 수업 시간에 잠을 자거나, 떠들었어. 그러면서도 국어 시험공부는 밤새도록 했어. 그러던 어느날, 너무 심하게 떠든 나머지 국어선생님이 '실장, 수업마치고 교무실로 따라와'라고 소리쳤어. 선생님은 만삭이었고,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상황이었어. 한숨을 내쉬면서, 실장이 그러면 되느냐며 다그쳤지. 아빠는 들은채 만채 했어. 물론 그 선생님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기뻐했지만. 더 화가 난 선생님은 뱃속 아이를 생각했는지, '무릎 끓고 있어'라고 지시했어. 그 때 아빠는 또 한 마디 했지. "남자는 여자 앞에서 무릎꿇지 않습니다" 2초쯤 지났을까, 주먹이 얼굴로 날아들었어. 옆 자리에 있던 남자선생님이었지. 4~5번 정도 주먹이 오가고 정신이 들어 씩씩거리며 아빠는 교무실 밖을 나갔지.

 

아빠, 참 부끄럽지? 그렇게 살았었단다. 이제와서 우리 딸 해방이를 마주하니 더욱 괴로워지기도 하고.

 

이제 태어난 지 이틀째인데, 벌써 여자로서 살아가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아빠가 우습지?

네가 마주할 세상은 과거 아빠같은 사람들이 아직도 많을 거야.

물론 같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네가 그런 느낌, 경험을 겪게 된다면 말야.

함께 공감하고 분노하고, 바꿔나가는 언니가 되어주고 싶어.

 

오늘은 네가 눈을 껌뻑거렸단다.

네 작은 몸짓 하나에 호들갑떠는 아빠를 보면 넌 어떤 생각이 들까?

오늘도 건강히 잘 있어줘서 고마워!

내일 엄마가 널 만나 꼬옥 안아주고 나면,

이름을 고민해봐야겠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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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드래곤로드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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